한라산 등반이 이루어지는 날 새벽부터 비가 내린다
평생지기 친구들과 밤을도와 기다린 역사적인 첫발을 빗속에 내딛는다
산은 오후 1시전에 진달래 대피소를 통과해야 정상에 닿을 수 있다
비가 구멍난 돌에 이끼낀 나무에 쏟아지고
친구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더니 어느새 앞질러 간다
나는 가까이에서 들리는 낮고 깊은 새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걷는다
한라산에 오기위해 예비한 세월은 비바람처럼 늙어갔지
경계선 안의 때죽나무 졸참나무도 비에 젖고
속밭 대피소가 곧 나타난다는 이정표도 젖어서 초라하다
나무계단을 다 올랐나 하면 흙탕물에 잠긴 내력에 빠지기도 하고
가도가도 안개에 가로막힌 산길에서
여태 무엇을 위해 무거운 걸음을 걸어왔나 싶다
무모한 도전인가 불분명한 명분이었을까
앞서가던 그들이 머물고 있는 대피소에서 잠시 쏟아지는 비를 피한다
깨진 창문에 붙어있는 안내문에 다음 목적지는 진달래 대피소
나의 갈등의 제목은 정상 정복보다는 과정이라 쓰고
한라산 백록담과의 만남은 다음으로 미룬다고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