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게 매화가 피었는데, 때맞춰 ‘우리詩’ 2월호가 왔다. 많은 시가 매화처럼 피어 있어 향이 쏠쏠하다. ‘권두시론’ 염창권의 ‘시의 위의를 생각한다’로 문을 열었고, 이달의 ‘우리詩’ 신작시 42인선은 임동윤 ‘늑대의 얼굴’, 이기철 ‘2월’, 구재기 ‘웃음에 대하여 2’, 도종환 ‘파고들다’, 김진광 ‘간고등어’, 김기택 ‘벨소리는 어디에서 오나’, 허문영 ‘면도’, 김영호 ‘산시 1’, 유승도 ‘일방적 사랑’, 김찬옥 ‘업보’, 황원교의 ‘지운다는 것과 빈 칸으로 남는다는 것’, 고성만 ‘CCTV’, 김나영 ‘이 편한 세상에서’, 이가을 ‘잘가라 인생’, 남유정 ‘길’, 이승희 ‘상처라는 말’, 우원호 ‘존 키츠John Keats의 유언遺言’, 김선호 ‘톨게이트 앞에서’, 송태옥 ‘나드리 추억’, 권순자 ‘섬’, 임술랑 ‘아름다움에 이끌리는 이 약속’, 차승호 ‘신례원을 지나다’, 차주일 ‘한 위인이 호號에 송松자를 쓰는 이유’, 최윤경 ‘떠돌아다니다’, 이경례 ‘밤의 천변에서’, 이성웅 ‘하늘공원’, 이수풀 ‘빨강과 파랑 사이’, 최재경 ‘진저리’, 한영채 ‘무렵과 무렵 사이’, 박승류 ‘물 만난 콘돔’, 이재부 ‘셈본’, 이종섶 ‘톱을 깎다’, 임미리 ‘검은등뻐꾸기의 화두’, 장상관 ‘곡비’, 황연진 ‘캔디’, 도복희 ‘유토피아를 꿈꾸는 방법’, 이성임 ‘달 섬’, 권은주 ‘갈대’, 변영희 ‘줄 타는 나날’, 이만섭 ‘자경문自警文을 읽다’, 이성혜 ‘폭설’, 조연희 ‘고양이 역장’ 외 각각 1편씩이 실렸다.
‘이 시, 나는 이렇게 썼다’는 조성심 ‘시, 공유하는 매체가 되어야 한다’, 서정임 ‘관계, 그 쓸쓸함의 완화를 위하여’, 나기창 ‘백두산정白頭山頂 반백두半白頭’, 이강하 ‘파도도서관과 양파링’, 김혜경 ‘모두 바람 때문이다’를, 신작소시집 1은 권혁수의 ‘청계천 건너기 외 5편’과 신현락의 해설 ‘안과 밖의 접점에서 만나는 타인의 얼굴’, 신작소시집 2는 강동수의 ‘다락방 외 4편’과 김진광의 해설 ‘감추어 둔 혹은 갇힌 것을 통한 갈등과 현실의 소통’을 실었다.
그리고 ‘한시읽기’는 진경환 교수의 "다시 ‘소인기(少忍飢)’를 생각하며"를, ‘영미시 산책’은 백정국 교수가 발레리 케이 그윈 작 ‘그 아이는 나의 것’을, ‘우리詩 시집 서평’은 박수빈(문학박사, 아주대 강사)의 ‘화두 혹은 발상과 표현의 묘미’, 정하해 시집 ‘깜빡’(2010, 시와 시학)’과 김홍진(문학박사, 대전대 교수)의 ‘일상적 생활 세계의 소묘와 비극적 통찰’, 전건호 시집 ‘변압기(2011, 북인)’를, ‘우리詩가 추천하는 좋은 시 읽기’는 이동훈 시인의 추천으로 문정희 ‘쓸쓸’, 이시영 ‘저녁의 시간’, 정일근 ‘자연론’, 박철 ‘굴욕에 대해 묻다’, 장석남 ‘꽃차례’, 양문규 ‘그곳으로 가고 싶다’, 임미리 ‘보이는 것이 많아진다는 것은’을, ‘우리시가 읽은 시집 속의 시 한 편’은 ‘박현솔, 전건호, 권정우, 손택수, 임연태'의 근간 시집과 시를 소개했다.
♧ 인생 - 이기철
인생이란 사람이 살았다는 말
눈 맞는 돌멩이처럼 오래 견뎠다는 말
견디며 숟가락으로 시간을 되질했다는 말
되질한 식간이 가랑잎으로 쌓였다는 말
글 읽고 시험치고 직업을 가졌다는 말
연애도 했다는 말
여자를 안고 집을 이루고
자식을 얻었다는 말
그러나 마지막엔 혼자라는 말
그래서 산노루처럼 쓸쓸하다는 말
♧ 산시 2 - 김영호
산은 내 가슴속의 어린아이
그 어린아이의 어머니이다.
그 어린아이에게 산물소리 젖을 물리고
그의 작은 심장에 독수리의 심장을 이식한다.
산은 내 몸 안의 노인
그 노인의 어머니이다.
그 노인의 상처마다 찬바람으로 가슴눈을 뜨게 하고
그의 마른 어깨 위에 독수리의 날개를 달아준다.
♧ 길 - 남유정
당신이 지나가셨다기에 흘리고 간 것이 있을까 눈여겨보며 걸었습니다 이렇게 둘레를 걸으면 언젠가 중심으로 향한다는 것을 믿었지요 나뭇잎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새들의 날갯짓 구절초 향기를 따라 숲으로 들어갑니다 당신이 이 길을 아무 생각 없이 지나셨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어깨에 가만히 내려앉은 단풍잎 한 장, 당신도 마침내 붉게 물든 마음 한 잎을 보여준 거라 믿어요 당신이 귀를 씻으며 지났을 물소리 해질녘 당신이 마음을 뉘어 먼 하늘을 바라보았을 바위 어느 생을 당신이 또 바람처럼 걸어가신다면 나는 붉디붉은 한 장 나뭇잎으로 바람소리를 담을 수밖에 없겠지요
♧ 상처라는 말 - 이승희
살고 싶어서
가만히 울어 본 사람은 안다
목을 꺾으며
흔적 없이 사라진 바람의 행로
그렇게 바람이 혼잣말로 불어오던 이유
이쯤에서 그만
죽고 싶어 환장했던 나에게
끝없이 수신인 없는 편지를 쓰게 하는 이유
상처의 몸속에서는 날마다
내 몸에서 풀려난 괴로움처럼 눈이 내리고
꽃 따위로는 피지 않을
검고 단단한 세월이 바위처럼 굳어
살아가고 있지
♧ 저녁의 시간 - 이시영
한때는 내가 어느 분야에서 세계를 모두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랬었다. 자고 나면 싸움이었고 자고 나면 연대 투쟁이었으며 성난 이마엔 상처가 늘어났다. 미안하지만 내 청춘은 그렇게 흘러갔다.
그러나 나는 이제 매미들이 자지러지게 우는 공원을 가로질러 점심도 혼자 먹고 저녁도 혼자 먹는 그늘의 시간 속에 서 있다. 아무도 이제 아름다운 연대를 이야기하지 않으며 이 복잡한 세계를 책임지겠다는 사람들도 없다.
저녁의 시간은 내게 그렇게 조용히 온다.
♧ 쓸쓸 - 문정희
요즘 내가 즐겨 입는 옷은 쓸쓸이네
아침에 일어나 이 옷을 입으면
소름처럼 전신을 에워싸는 삭풍의 감촉
더 깊어질 수 없을 만큼 처연한 겨울 빗소리
사방을 크게 둘러보아도 내 허리를 감싸 주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네
우적우적 혼자 밥을 먹을 때에도
식어버린 커피를 괜히 홀짝거릴 때에도
목구멍으로 오롯이 넘어가는 쓸쓸!
손 글씨로 써 보네. 산이 두 개나 위로 겹쳐 있고
그 아래 구불구불 강물이 흐르는
단아한 적막강산의 구도
길을 걸으면 마른가지 흔들리듯 다가드는
수많은 쓸쓸을 만나네
사람들의 옷깃에 검불처럼 얹혀 있는 쓸쓸을
손으로 살며시 떼어주기도 하네.
지상에 밤이 오면 그대에게 술 한 잔을 권할 때도 있네
이윽고 옷을 벗고 무념의 이불 속에
알몸을 넣으면
거기 기다렸다는 듯이
와락 나를 끌어안는 뜨거운 쓸쓸
♧ 자연론 - 정일근
풀 한 포기 밟기 두려울 때가 온다
살아 있는 것의 목숨 하나하나 소중해지고
어제 무심히 꺾었던 꽃의 아픔
오늘 몸이 먼저 안다
스스로 그것이 죄인 것을 아는 시간이 온다
그 죄에 마음 저미며 불안해지는 시간이 온다
불안해하는 순간부터 사람도 자연이다
♧ 궉새를 부르다 - 박현솔
-- 자청비
고운 무명천에 쓴 먹빛 사연, 편지를 든 두 손이 떨려온다. 그녀의 눈빛이 수려한 필체의 물살을 타고 흐르다가 어느 굽이에선가 멈춘다. 가서 안부만 전하고 오겠다던 님이 활짝 핀 꽃향기에 취해 오늘도 못 온다는 소식을 보냈는가. 이승과 저승의 인연을 이어준다는 궉새. 신화 속의 새를 간절하게 기다린다. 눈앞을 빗겨나는 새들이 궉새가 아닌지. 하늘의 언저리를, 나무의 흔들림을 유심히 바라본다. 두 눈의 눈물로 베틀을 짜고 몸에서 풀린 실로 비단 이불을 짜서 오지 않는 님을 애타게 기다린다. 비단 이불에 수놓은 이름을 보고 님이 오신다면, 짓무른 마음속에서 지웠던 실올들, 모두 다시 살아난다고 전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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