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로 大雪인 바다는 아침안개로 희뿌옇다. 경계가 무너진 회색의 세계로 한 점 배가 지나간다. 배가 지나간 자리는 금새 흔적이 지워져 고요하기만 하다. 세월을 표현하면 곧 물이라는 연상 단어를 떠 올리게 된다. 매우 중요하지만 간과되는 존재감 혹은 죄다 내주고도 흔적없이 사라지는 그 무엇의 희생이랄까.
어느날 누군가로부터 전화를 받는 순간 아득한 비밀의 정원에 홀로 떨어진 느낌을 받았다. 혹시 '젬마'라는 사람을 알고 있는가?' 추모미사에 다녀왔다며 동문인걸로 알고 있는데 그녀의 죽음을 아는가 , 전화기가 손에서 떨어진다. 詩人 젬마의 영혼은 투명하고 자유로워서 경계가 없었다. 내가 그녀와의 인연은 신학원 입학식에서부터 시작된다. 맨 앞자리에서 개량 한복을 입고 다소곳하게 서 있었는데 장애를 갖고 있었다. 등뼈가 튀어나온 소위 곱추라는 다소 불편한 장애를 가졌음에도, 무척 밝은 표정의 그녀가 먼저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공부에 대한 열망이 때론 과장되게 표현되기도 하였지만 심성이 곱고 야무진 그녀가, 쉬는 시간에 글 몇 편을 건네준다. 글을 쓰고 싶은데 표현방법이나 비유법을 잘 몰라서 고민이라며 봐주길 원했다. 동문인데 굳이 외면할 이유가 없고 무엇보다도 먼저 다가온 그녀가 존경스러웠다. 글제를 찾아 을숙도 갈대밭으로, 나무가 빽빽히 들어선 겨울 숲으로 , 비가 줄기차게 내리는 장마에도 함께 차를 타고 글나들이를 다녔다. 언제나 맛있는 간식과 차를 준비해와 대화의 끈을 연결해 주었고 맑고 선한 웃음을 선물해주던 그녀였다. 어느정도 자신감이 생기자 부산에서 발행되는 계간지에 응모하여 등단을 하였다. 축하와 더불어 시집을 발간하였고 창작 작업에도 활발했다. 가톨릭문협회원이며 선교일로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그녀가 늘 새로웠고, 또한 장애우를 돌보는 사업도 날로 발전했다. 2 년간의 공부가 끝나고 졸업을 하면서 그녀는 사업쪽으로 무척 바빴다. 전화로만 안부를 묻곤했는데 언제부터인지 그것마저도 연결이 안되는 일이 많았다. 관심과 무관심의 다리를 아슬하게 건너다녔다. 그로부터 5~6년이 지난 지금에 비보를 들었으니 '내 탓이오'
" 하느님 젬마를 기억해 주십시요 그녀는 세상살적에 남을 위해 자신을 내어준 사람입니다. "
사람냄새가 그리운날 찾게되는 정인이었음을 고백하고 싶다. 그러한 사람을 내 스스로 관리소흘로 인하여 고리를 끊었으니 죄가 크다.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홀연히 떠난 그녀가 그립다.
비라도 세차게 내려준다면 영혼교환이라도 해서 구원했을텐데 비는 오지 않고 서서히 걷혀가는 안개 그리고 젬마의 영혼. 안타까운 현실은 전화를 걸었더니 묵묵부답이다. 세상과의 인연을 끊어버린 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