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가 시작되고 주말이기도 하기에 동생과 친정으로 향한다. 몸이 안좋은 엄마의 일손을 도와주는 차원이긴해도 사실은 심적인 부담을 덜기위한 움직임이다. 지난번 허리수술 이후 한달이라는 시간이 지났으니 찾아뵙는 게 순리이기도 하다. 동생과 차를 타고 친정가는 과정이 서로에게 소중한 대화의 시간이다. 수다로 풀어야하는 잡다한 일상이 치유가 되기도하고 우의도 돈독해져서, 도착지점에 이르면 말갛게 웃음이 번진다. 공유하는 추억이 많고 감성이 잘맞는 자매라 편하다. 오늘의 할일은 청소와 냉장고 내용물 치우기, 냉장고 나이만큼 쌓여있는 냉동식품들은 엄마의 마지막 보루인양 접근금지였다. 몇번을 청해보았지만 '내 죽거든 치워라' 라며 강경한 엄마. 참 이상한 방법으로 집착증세를 보인다 싶다. 저녁에 집안청소를 하면서 예의 냉동실을 치워야겠다고 했더니, 대답은 하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의사표현을 하는 엄마. 치울게 뭐가 있냐라며 오히려 반문한다.
몇번의 허리수술과 다리 관절 수술로 허리가 굽었고 보폭이 짧아져 종종걸음이 되어버린 엄마의 연세는 팔순이 넘었다. 늘 강인한 정신력으로 우리를 긴장하게 하던 당신의 기개는 흐릿해져가는 눈빛처럼 낮고 약해졌다. 오랫동안 남편의 병수발로 지친 육신을 내려놓을 때가 가까워지고 있나보다. 자신의 남동생 위암수술로 한순간 놀라 병원에 다녀왔다고 한다.
여자 셋이서 냉동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식재료들을 꺼내 놓으니 왠만한 이삿짐 수준이다. 차곡차곡 켜켜이 쌓여있는 묵은 사연들이 쏟아지며 냄새까지 봉지마다 다르다. 안절부절하는 엄마의 눈빛을 피하며 빠르게 진행한다. 나는 꺼내고 닦는일을 올캐는 기구들을 물로 씻고 막내는 분리수거 봉지에 담아내는 일을 각각 맡았다. 입실 날짜대로 골라 다시 넣는 일도 제법 시간을 요하는 일상이다. 냉동실에서도 서로 부대끼며 저들끼리 상처를 낸 봉지들도 많다. 묵은 때를 닦아내는 일에 익숙한 주부 30년차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고무장갑이 둔해서 맨손으로 하자니 손바닥이 화끈거려 화상입은 것 같다. 골라낸 것도 다시 넣어두라며 간섭을 하고 있는 엄마의 정신력은 아무도 못 말린다.
냉동실에서 냉장실로 옮기니 역시 마찬가지이다. 몇 개월전에 청소며 정리까지 했던 냉장실의 상태도 심각하다. 누구를 탓하리오. 시간이 흘러가면서 조금씩 정리도 되긴하는지 가속이 붙는다. 아! 갑자기 어지러워서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아직도 내 머리와 가슴은 엄마와 화해를 하지 않았는데 하는 회의가 밀려온다. 엉어리진 철없는 딸의 푸념을 엄마는 모르고 지금도 너무 쉽게 대한다. 엄마가 가족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던 것들이 그대로 학습이 되어버린 가족들의 몸짓, 그들은 모른다 나의 모멸감과 자괴감을 순간, 설운 마음에 울컥해진다. 왜 나의 정신연령은 멈춰버렸는지 원망스럽다. 털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고스란히 되살아 움직이며 목을 누른다. 큰딸은 맏이라 정이 다르고 밑의 남동생은 장손이라고 보살피는 엄마. 난 언제나 천덕꾸러기로 일만 시켰던 당신의 작은딸이 지금 머리가 아프다고요. 그래 이 쓰레기 더미안에 나의 유년을 함께 넣어 버려야지 깨끗하게 비워진 냉장고처럼 그렇게. 서둘러 바닥을 닦아내고 더운물로 샤워를 한다. 물속에서 쏟아지는 눈물, 치유되지 않는 상처를 이제는 정말 묻어버리고 싶다.
밖으로 나와 뒤를 돌아보니 깨끗하게 닦여진 냉장고가 그곳에 서 있다. 오랜 숙제를 마치고 가벼위진 몸과 맘으로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 간다. 왔던길은 언제나 익숙해서 두렵지 않다. 곧 다가 올 것같은 엄마의 시간, 어둠이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입에 올리며 동생이랑 음악을 듣기 위해 볼륨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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