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처음처럼

후야 mom 2010. 8. 7. 09:04

 일찍 집을 나선 길이 정오를 넘어가고 내려쬐는 땡볕은 한치의 양보없이 정수리에 닿아 어지러운 날 친구랑 순천만으로 간다.  순천은 송광사, 보성, 벌교로 잇는 '태백산맥'의 산실이며 지리산이 병풍처럼 배경이 되어주는 그림이기도 하다.  어렵사리 딴 운전면허증을 손에쥐고 맨처음 찾아 온 곳도 순천이다.  좌,우 방향도 제대로 구분 못할 때의 경험이라 아직도 가슴이 떨린다.  양보를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주춤거리다보면 어느새 내곁을 지나가버리는 현상을 두고 양보라고 하겠지.  언젠가 자신이 차를 운전하게 되면 제일 먼저 찾아가리라 가서 아름다운 연인 '소화와 정하섭'의 애틋한사랑을 만나고 싶었다.  소설은 이념을 떠나서 역사를 가동시키며 정체성을 찾게 해주는 보물이다.  밤을 도와 읽었던 내 청춘의 찬란한 시기이기도 했다.  벌교의 짭짜름하고 쫄깃한 사투리의 정수를 만나며, 그들이 만들고 지켜주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한 벌교.  유람선을 타고 늪의 가장자리로 가서 만나는 철새들은 느리게 흐르는 구름을 바라보며 낭만을 구가하고, 고여있는 듯 머물지 못하는 강물도 시간을 거슬러간다. 

 현대 문명병이라 일컫는 우울증이 시작된 것은 서른고개를 넘고 여자나이 절정을 이루는 사십대로 접어들고부터 였다.  어느날 우연히 욕실 거울을 보게되었는데 거기에 엄마얼굴이 마주보고 있었다.  순간 기겁을하며 도망치려는데 스치는 기억하나가 또렷하게 보인다.  반항기 소녀는 장래희망란에 엄마같은 삶은 절대로 살지 않겠노라고 적었다.  그랬던 그녀는 같은 얼굴로 반복되는 일상에 갇혀 지내고 있었던거다.  들여다보면 이루어 놓은 것 하나없고 무기력한 전업주부로 살아내고 있는 자신이 안타까워 날마다 울었다.  무작정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며칠씩 끼니를 굶기도 했지만 공허한 가슴속을 채울수는 없었다.  그때 문득 기억되는 것이 일기장이다.  아마 초등학교 숙제 때문에 시작된 일기가 해를 거듭하고 시간을 채워가고 있었다.  기분에 따라 들쭉날쭉 했겠지만 몇권의 재산으로 불어났다.  살아야겠다는 간절함이 이것을 찾게 했는지 갑자기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오래묵은 세월을 털어내고 기억을 살려내니 맑은 사춘기가 눈에 들어온다.  중학시절 백일장에 참가해서 겨우 입선을 했다는 기록과 선생님의 격려가 적혀있다. '이담에 좋은 작가가 될 소질이 있으니 책을 많이 읽어라' 는 국어선생님의 말씀이다.  죽어가는 제자를 살려낸 그분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조차 까맣게 잊고 살고있다.  누가 그랬지 행복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라고.  안정제 몇 알 먹고 죽은듯 잠들었던 시간을 돌려내야겠는데 자꾸만 뒷걸음질치는 자신이 안타깝다.  마침 내가 살고 있던 중소도시에서는 해마다 10월이 되면 시민 백일장이 열리고 있었다.  아마 몇주전부터 현수막이 걸려있었을텐데 그냥 지나쳤던 것이 비로소 눈에 띈다.  어느 신문사가 주최하는 백일장에서 가작이라는 상을 받고나니 우울증을 앓았던 기억마저 사라졌다.  하느님은 나를 버리지 않았구나 .  단지 시제에 맞는 단어를 선택했을테고 맘이 가는대로 연필도 움직였을텐데 손을 잡아준 신문사가 고마웠다.  희망의 씨를 묻으면서 회복속도도 빨라졌다.  닥치는대로 쓰고 지우고 일상은 온통 글작업으로 채워져갔다.  문학아카데미에 기웃거리고 신문사 독자란에도 투고를하면서 감히 신춘문예도 도전하기도 했다.  물론 거울도 열심히 닦았다.

 유람선에서 내리니 땡볕에 눈을 뜰 수가 없다.  앞서가는 젊은 부부의 아기 울음이 하늘을 찢을 듯이 강하다.  표현수단이 울음인 아기의 존재감이 서툴지만 분명했다.  우리가 걸어가는 이곳은 철새가 쉬어가는 주막같은 곳이다.  시냇물이 모여서 강이되고 바다가 되어 하늘로 다시 올라갈 것이다.  행간에 울고웃는 창작으로 밤이가고 낮이 되돌아간다.  좁고 요철이 심했던 신작로가 넓어지고 포장이 되어 공유하듯이 나의 글도 세상보기를 하고있다.  처음처럼 때묻지 않기를 바라지만 군더더기에 설명이 많아진다.  삶이 복잡할 수록 글도 같이 늙어가고  안경도 오목에서 볼록으로 바뀐지 오래이다.

 꼬막정식을 시켰더니 무침에 전, 차려지는 음식마다 꼬막이 들어있다.  이곳이 아니면 참맛을 맛보지 못한다.  쫄깃한 맛에 순천만은 깊어지고 발가락의 물집은 부풀어올라 곧 터질것만 같다.  초록의 갈대가 갈색으로 변하면 다시 이곳을 찾으리라.  바람처럼 물처럼 함께 걸어온 나의 친구도 동반하겠지. 그때에는 태백산맥 문학관에 들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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