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주는 즐거움은 내 발로 잠자는 역사를 깨워 또 다른 시대를 열어가는 지침서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10년지기 이웃사촌 네 가족은 해마다 국내유적지를 여행하면서 내일을 기약하고 우의도 다지며 함께 늙어가는 아름다운 모임이다. 부부가 함께 다니니 부담도 줄고 시간에 대한 구애도 없어 편하지만 자유롭지 못하다는 단점도 있다. 충북 청원으로 전근간 회원의 배려로 그곳 주변을 관광하기로 하였다. 토요일 새벽에 집을 나선 길이 정오가 되서야 도착했다. 장장 300Km가 넘는 긴 거리를 무더위와 폭우가 동승하여 여행의 특별한(?) 맛에 점점 길들여진다. 태풍 '곤파스'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북상중이라는 방송을 보고도, 여행을 감행하는 우리는 이번이 아니면 내년으로 미뤄야하기 때문이다.
충북 청원군 문의면에 있는 '청남대'는 대통령의 전용 별장으로 주위 경관이 수려하다. 대청호가 가까이에 있는 마을은 전형적인 시골이다. 들에는 벼가 제법 노랗게 익어가고 옥수수 찌는 냄새에 가을이 묻어난다. 이런 시골에 작은 청와대라고 불리워지는 '청남대'를 왜 지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국가적으로 긴박한 상황 즉 전쟁이라든가 아니면 큰 재난이 생겼을 때를 대비한 건축물이라해도 수도와 너무 먼 거리가 아닌가. 오랫동안 미공개로 있다가 참여정부 시절에 비로소 일반인들의 출입을 허용한 곳. 실내에는 전직 대통령들이 다녀가면서 남긴 사인과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담백하고 품격있는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온다. 국 내외빈이 묵었던 방, 거실이 생각보다 소박하다. 국민의 세금으로 지어진 건축물이라 그런지 뒤를 돌아보게하는 묘한 감정이 있다. 태풍 '곤파스' 의 위력인지 연꽃이 심하게 흔들린다.
옥천군에 있는 詩人정지용 문학관과 생가터에 닿는다. 마을전체가 시인을 닮아 우체국이나 상가에도 싯귀가 적혀있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입구에 詩碑 '향수'가 서있고 신세계로 안내하는 이미지상도 있다. 돌다리를 건너가 만나는 시인은 아주 젊은 청년으로 앉아서 손을 내민다. 어깨너머로 보이는 고향의 그림과 음악이 눈을 감은 듯 유토피아로 간다. 꿈엔들 잊힐리 없는 시인의 고향에서 그를 만나니 폭우가 두렵지 않다. 춘추문학관 뜰의 잔디가 진초록으로 누워있고, 그의 생애와 문학이 영원히 살아서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어주는 곳에서 나그네도 목을 축이며 돌아나온다.
근동에 죽향초등학교가 보이는 곳에서 몇발자국 옮기면 故 육영수님의 생가가 있다. 옛날 참봉이 살았을 것 같은 99칸의 전통가옥이 박물관처럼 서 있다. 재건축을 하여 서둘러 개방을 하면서 집기류나 서류, 그밖의 세간살이들이 미처 구비되지 않았다고 한다. 주위의 낮고 아담한 농가와 대조적인 건축물 빈집에 관광객들만 즐비하다. 농경사회에서 급격하게 산업사회로 전환되면서 혼란과 격동기를 겪은 역사를 잠깐 떠 올려본다. 단아하고 곱던 영부인 영원하길 기원한다. 길 건너에 있는 묵집에서 충청도의 별미인 묵 한사발을 먹고 옥천을 떠난다.
간만에 에어컨의 힘을 빌리지 않고 내륙지방에서 낮은 습도를 즐기며 잠을 청한다. 마루에서는 잠을 설쳐가며 남자들의 요란한 영웅담이 오고가고 밤은 저홀로 깊어간다.
아침부터 잔뜩 흐린 하늘을 이고 충북 괴산을 거쳐 운보의 집, 초정약수까지 들러볼 요량으로 길을 나선다. 괴산은 특산물인 고추축제를 하고 있는 곳으로 현장경험을 하고 싶다는 아지매들의 소원이다. 갖가지 농산물들이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는 강변에서 먹거리들과의 추억도 새긴다. 토속주(막걸리), 햇땅콩, 복숭아, 멜론등 다양한 농산물로 축제는 마지막날을 장식하듯 많은 양의 고추가 팔려나간다.강변로에 뛰어다니는 꼬맹이들을 만나서 사진 한 컷을 선물받고 초컬릿 하나씩 건네주며 같이 웃는다. 고추잠자리가 강위로 날아다니는 시골장터에서 뙤약볕과 함께 계절이 익어간다. 불과 몇년전만 해도 다들 이렇게 살았는데 푸르게푸르게 젊던 그시절로 되돌아 가고 싶다.
땀을 닦으며 달려간 곳은 청원군 내의면에 있는 '운보의 집' 몇년 전에 화백께서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방송에서 봤다. 미술사의 전설적인 인물로 뵙고 싶었다. 바보산수화와 회화며 석판화는 세계적이다. 농아로 살아오면서 장애인들을 위한 장학재단을 설립한 그는 국가로부터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기억되는 건 만원권의 세종대왕을 그린 분이시다. 천부적인 재능에 걸맞는 아내 박래현님도 화가이며 평생 뒷바라지로 대가를 탄생시켰다. 인상깊은 그림은 성당 앞에 선 임산부를 그렸는데, 그분이 아내이며 훗날 아기가 자라서 수녀가 되었다고 하니 예시를 받았다는거겠지. 로마 바티칸에도 걸려있다고 한다. 아름다운 정원과 조각공원이 있는 미술관에서의 시간은 영원히 멈추어 있다.
갑자기 천둥번개가 겁나게 내리치는 청원군에서 점심식사를 한다. 장뇌삼으로 오리백숙을 시키니 장뇌삼 한 뿌리를 생으로 먹어라고 준다. 목으로 넘어가는 쓴 액체와 향이 너무 진해서 싫다. 몸에 좋다니 서로 먹으려고 하는 꼴이라니 (^^) . 바깥에서는 번개가 수시로 번쩍인다. 태풍이 지나가면 가을의 노래가 시작되겠지. 해운대에서 시작한 여행은 내일을 기대하며 청원에서 막을 내린다. 길고 긴 시간과 사람들을 만나고 낭만을 쫒아다닌 계절의 끝에서 난 오늘을 적고있다.
결핍은 여행의 원동력이며 또한 나를 살리는 행위예술이다. 모자람을 채우기위해 길을 떠났지만 되돌아오는 시간은 행복했다라고.